메이지신궁을 보고 나오는 길, 아까처럼 남쪽으로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측면에 하라주쿠역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 있었다.
이리로 가면 된단 말이지...
10분 정도 걸으니 시부야 하라주쿠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라주쿠역 앞은 뭔가 복고적이고 퇴폐적인? 일본 속에 유럽이나 인도같은 것이 녹아있는 '이국적인 일본'을 연출한다.
일본가옥 형태의 집에 서양적인 탑이 합쳐져 있는 하라주쿠역 건물부터 그런 느낌. 이런 '이국적인 일본'은 하라주쿠역 앞에 펼쳐져 있는 다케시타도리의 문화와 관련이 많다.
竹下通り, Takeshita Street
하라주쿠 다케시타도리(原宿 竹下通り)는 길이 350미터에 불과한 거리지만 젊은 사람들로 늘 북적거린다.
이곳의 젊은 분위기, 이국적인 분위기는 홍대, 이태원과 비슷하다.
메이지신궁, 요요기공원 일대는 원래 미군 기지였고, 미군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었던 곳이 바로 하라주쿠였다. 이후 이곳은 고급아파트가 들어선 부촌이 되고,
그리고 나서 1980년대 초반 화려한 옷을 입고 디스코리듬에 춤을 추는 사람들이었던 타케노코족(竹の子族)의 출현으로 지금의 다케시타도리가 된다.
다케시타도리는 지금은 유행지난, '그 시절'이 된 독특한 일본 키치 문화다.
지금도 운영되는'부티크 타케노코(ブティック竹の子)'라는 점포에서 파는 괴상하고, 화려한 의상들을 입고 모여서 춤추한 사람들이 타케노코족이었는데, 말 그대로 타케노코(竹の子)의 가족(族)이라는 뜻이다. 이곳 거리는 한때 2천명의 타케노코족이 모이기도 했던 일본 키치 문화의 성지였다.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곳이었던 이 일대에서는 지금도 고스로리, 신발굽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아츠조코구츠 등 특유의 패션이 깃든 옷을 팔고 있다.
マリオンクレープ原宿竹下通り店, MARION Crepe
크레이프(crepe, クレープ), 한국에서는 주로 크레페라고 부르는 음식은 타케노코족들의 주식이었다.
크레이프 케이크는 얇은 밀가루 반죽을 익혀서 여러 장을 쌓아 만든 프랑스의 케이크인데, 타케노코족들이 춤추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먹었던 음식이 이거였다. 이곳의 크레이프는 200도씨 온도의 철판에서 짧은 순간 바삭하게 만드는 기법이 특징이라고 한다.
1976년 작은 포장마차로 시작한 마리온 크레페는 타케노코족들 덕분에 인기를 얻어 1977년에 이곳에 점포를 열어 본격적으로 영업한다. 한손에 들고 먹기가 제격이니까 춤추면서 먹기 좋은 메뉴였을 듯.
'생크림', '바나나 초코 생크림'은 크레이프의 대표 토핑으로 크레이프가게들의 공통 메뉴다. 참치나 치킨이 들어있는, 달지 않은 토핑 재료로 만든 '식사용 크레이프'도 있다. 100개는 족히 넘을 메뉴들이 있고, 메뉴마다 번호가 있어서 그 번호를 카운터에 말하면 된다.
이곳 마리온 크레페는 옆 점포인 엔젤스하트와 더불어 한국에도 진출했다. 메뉴를 들여다보다가 식사로 먹을 마땅한 크레이프가 눈에 띄지 않아서 엔젤스하트 쪽으로 가보았다.
エンジェルスハート, Angel's Heart
내가 이곳을 갔던 2018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줄서서 먹고 있던 엔젤스하트. 지금 구글지도를 찾아보니 폐업했다고 나와있다.
왜지, 줄서서 먹는 집이었는데.. 엔젤스하트가 폐업한 이유는... 뭐랄까, 그때 그렇게 많았던 타케노코족이 왜 지금은 사라졌는지에 대한 답과 비슷할까? 문득 든 생각이다.
엔젤스하트 앞에서 줄을 선 사람들
닭고기가 들어있는 크레이프를 주문했다.
바사삭거리면서 씹히는 맛이 좋다. 닭고기, 오이 조합도 좋고.
내용물에 비해 좀 비싸서 그렇지, 맛은 좋구나. 이 돈에서 좀만 더 보태면 거의 라멘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데... 타케노코족들이 이걸 먹고 힘을 내서 춤추기에는 좀 부실하지 않을까? 두세개는 먹어야 할 것 같다.
어, 650엔에서 390엔으로 할인하는 아이스 스트로베리가 눈에 띈다. 마침 할인하는 걸 충동구매함.
다시 쪼개지는 잔돈. 1엔 짜리들이 부담스럽구나
아이스 스트로베리, 아이스크림을 갈아버린 순간을 보존한 맛이다.
입에 넣자마자 설설 녹는게 먹기가 아까울 지경.
결국 크레이프 + 아이스 스트로베리 해서 라멘 가격을 초과했다.
애초에 오늘은 가난한 타케노코족이 되어보고 싶었는데, 별로 먹지도 않았는데 천엔 가까이 썼구나. 그러고보면 타케노코족들은 애초에 풍족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싸 5명이 모이면 인싸가 되는게 아니라 아싸 5명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타케노코족들은 애초 그렇게 모여있으면서 뿔뿔히 흩어져 있던, 음악과 춤으로 살던 사람들 아니었을까?
입 속에서 한 순간 녹아버리는 아이스 스트로베리같은, 시간은 때로 그런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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